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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완의 문화산책 31 / 1832년 고대도에 온 영국 암허스트 호 ①

신재완 보령문화원장 

 

보령 앞바다 고대도에 1832725일에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가 도착하였다.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 귀출라프 등이 상륙하여 통상 교섭 및 선교 자유를 요구하였다. 정부에서는 주민 접촉과 일체 물품 교환도 허락되지 않는 완강한 쇄국의 거절과 생명위협으로 2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하지만 통상 교섭과 결렬의 과정, 한문 성경, 감자, 포도주 재배법 전래, 한글의 유럽 전파 등 역사상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당시 상황을 영국과 조선 측에서 모두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는 1. 암허스트호 선주 린제이의 조선항해보고서(1883), 2. 통역 겸 선목 귀출라프의 조선선교여행기(1884), 3. 순조실록32(공충감사보고, 중국보낼 자문, 황해감사보고, 비변사 파송요청), 4. 김경선의 영길리국표선기(1832) 등이 있다. 앞으로 수회에 걸쳐 그 기록을 살펴보겠다.

 

우선 암허스트호 선주 린제이가 기록한 조선항해보고서(1883) 중심으로 통상 교섭의 대강을 본다.

 

1832721일에 보령 녹도에 영국 군함 암허스트호(The Lord Amhest)가 나타났다. 이양선 접근을 인지한 충청수영에서는 연락관을 파견하여 이양선의 접근 경위와 이양선의 실체를 알아보았다. 암허스트호는 조선에 통상과 선교를 요구하고 긴급 재난 지원을 청하였다. 급파된 등노(Teng-no), 양희(Yang-yih)는 귀출라프와 필담으로 소통하였는데, 녹도는 큰 배가 정박하기에는 매우 위험하고, 책임 있는 관리자를 만나려면, 또 긴급 재난 물품 지원이 가능한 동북쪽 내륙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였다. 배는 도선사의 안내를 받으며 내륙으로 7마일 더 이동하여 725일 불무도를 지나 고대도 간갱(Gan-Keang) 즉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다.

 

암허스트호는 500톤급의 큰 삼범선으로 포문 16문 이상의 총포가 실린 군함인데,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상 교섭과 통상 여건 조사 임무를 갖고 있었다. 배에는 동인도 회사 소속의 선주(船主) 린제이(H. H. Lindsay), 선장(船長) 리즈(Thomas Rees), 통역, 선의(船醫) 및 선목(船牧)으로 독일인 귀출라프(Karl Gutzlaff) 등이 있었고, 그 외 선원 67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1816년 남포 마량진에 온 <바실 홀>이 기록한 조선탐사여행기를 숙지하였으며 그가 그린 해도를 참고하여 조선 항해에 올랐다.

암허스트호는 중국 광동을 1832226일 출발하여, 그동안 마카오, 타이완, 영파, 상해 앞바다, 산둥 반도 인근, 위해위를 거쳐 황해를 건너 조선에 왔다. 암허스트호는 717일 황해도 장산(長山) 조이진에 도착하여 최초 조선 어부 두 사람을 만나 책 몇 권과 단추를 주고 물고기 몇 마리를 받았으며, 이어 지역 경계 관리 3인을 만나 통상을 위해 국왕께 전해달라는 통상의 뜻이 담긴 서한과 예물을 전하려 하였으나, 조선 정부의 외국인과의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일방적 방침만 통보받았다.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책을 주었더니 불가(pulga)’라며 돌려주기도 하였다. 관리들에게 책임 있는 고관을 파견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즉시 떠날 것을 요구를 받았고 그러하지 않으면 체포할 것이며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라며 목을 자르는 표시로 위협을 당하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장산을 떠나 남하 중 풍랑을 만나 긴급히 721일 녹도에 정박하게 되었고, 724일 급파된 등노라는 조선 관리를 만나게 되었다.

안전한 항구 간갱(Gan-keang)으로 도착하니 다음 날 고관이 암허스트호를 방문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726일 아침 김대인과 이목사의 방문을 받는다.

 

린제이 :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귀국과 통상을 하려는 것이오. 배도 국선이고 서한도 국사에 관한 것이오.

, : 좋습니다. 서한은 무엇이오.

린제이 : 조선 교섭관인 양의와 등노가 보는 앞에서 국왕에게 보낼 예물을 포장하고, 목록 작성하여 드립니다. 서한은 황해도 장산에서 기록한 그대로다.

영국인 선장 호하미(Hoo Hea-me, 胡夏米)는 조선의 국왕 폐하 존전에 감히 다음과 같이 같이 청원하나이다. ~ 이 배는 대영제국의 속국인 ~ 인도에서 출발한 상선입니다. ~ 여러 상품을 은이나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교환하고 또한 법에 따라 관세를 지불하려고 합니다. ~ 대영제국이 귀국과 한 없이 먼 거리에 있지만, ‘사해의 모든 인류는 형제입니다.’~
폐하께서 저희 동포에게 통상을 허용하여 주시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은혜를 베푸사 이 같은 내용을 밝히는 명령을 내려주시길 앙망합니다. ~
폐하께서 만수무강을 누리시고 귀국이 평화와 평온 속에서 계속 번영하기를 기도합니다.
英國紀 1832717, 道光 12620, 壬辰
예물 목록
우단(大呢), 최상품, 4() 색상 다양, 우모(羽毛), 6(), 색상 다양, 양포(洋布), 14(), 망원경(千里鏡), 2유리그릇, 향수병, 꽃병 등(琉璃器), 6, 사자무늬 단추(花金紐), 12타스(6), 다양한 주제의 책자, 성경완역본 2, 지리 천문 과학에 관한 논문집 2질 등등, 대부분 밀른 박사가 중국인을 위해 기고한 것을 귀출라프가 가져온 것임

 

이날 오후 4시 암허스트호에서 린제이, 귀출라프, 심슨, 스티븐슨은 조선 측 연락관과 함께 보트를 타고 고관이 임시로 거주하는 섬에 상륙하여 조선 관리들에게 그들이 온 목적을 밝혔다.

, : (조선 국왕에게 보낼 통상청원서를 먼저 전달받자) 예물도 가져오시오.

린제이 :(마을로 들어가려면 가기 전에 여기서 예물과 서한을 모두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안됩니다. 이런 무례한 방식으로 국왕에게 보낼 예물을 전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고 이렇게 대우한다면, 당신들의 고귀한 국왕께서는 이 누추한 차양(遮陽)에서 서한과 예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질책할 것입니다.

, : 이것(외국인에게 물품을 받는 것)을 금하는 것은 국법입니다.

린제이 : 그렇다면 서한과 예물을 함께 주도록 서한을 돌려받아야 하겠습니다.

, : (국왕에 대한 예를 중시하는 관리는 할 수 없이 그 서한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조선 고관들은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집안을 정리하고 돗자리를 깐 후 린제이 일행을 인도하여 자리에 앉게 하였다. 린제이는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고 예물과 서한을 고관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이른 시일 내에 국왕에게 이를 전달하고 그것을 약속해 주어야 한다는 글을 적은 종이도 전해 주고 돌아왔다.

 

726일 고대도에서 전달된 책자 한 권과 예물 도록 한 벌은 바로 상급기관인 공충 감영에 보내졌고 보고를 받은 공충감사 홍희근은 그것을 다시 굳게 봉해 조정의 해당 부서인 비변사로 올려보냈다고 한다. 726일 저녁 8시에 조선 관리 서관인 두 연락관 등노와 양희가 다시 배로 찾아와 배의 화물, 모든 승무원의 이름, 배의 규모, 돛대의 높이 등 여러 가지를 조사해 갔다. 그리고 727일에는 수군우후 김형수와 홍주목사 이민희가 다시 배로 찾아와 여러 가지를 조사하였다. 728일 양희와 등노가 긴 항목의 질문지를 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선표나 선적 등록증이나 인가증을 가졌는지 질문하고 군선에 대하여 대포는 얼마나 실었는지, 얼마나 많은 소총과 권총, 창과 칼 등 실려있는지 물었다. 730일에는 정3품인 공충수사 이재형 장군의 방문이 있었다. 오후에는 수군우후 김형수와 수군수사 이재형 장군이 마련한 음식을 대접받았다.

 

린제이 : (관리들이 떠나기 전에) 언제 답신을 받을 수 있습니까?

, : 며칠 동안 편히 기다리시오.

린제이는 전날 수군우후 김형수에게 부탁한 식량이 오지 않았으므로 이재형 장군에게 또 목록을 주면서 (식량을) 부탁하였고 이 장군은 다음 날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국왕의 답신을 기다리던 중, 731일부터 친절하였던 조선 관리와 주민들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고 통제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87일 답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린제이 일행은 작은 배를 타고 천수만 일대, 간월도, 태안의 창리 탐사하고 작은 섬에서 1박까지 하였다. 88일 본선 귀선하니, 이미 전달된 줄 알았던 국서와 예물은 물론 그동안 관리와 주민들에게 가끔 선물로 준 사소한 물건까지 모두 조선 관리들이 모아 암호스트호로 가져왔다. 선박에 남아 있던 리스 선장은 이를 돌려받기를 거절하였고 수군 우후 김형수는 무척 낙담해져 해안으로 돌아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