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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완의 문화산책 33] 1832년 고대도에 온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 귀출라프

신재완 보령문화원장

 

 

암허스트호의 통역관 내지 선목으로 귀출라프가 고대도에 오기 전에 이웃 비인 마량진에 18169월에는 영국 해군 대령 맥스웰(Murra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은 큰 배 알세스트(Alcest)호와 작은 배 리라호를 타고 도착한 역사가 있다. 그들은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을 만나 교류하려 하였지만 의미있는 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조선 측에서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영국 배에는 필담이나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그들 배에는 중국인도 동승하였지만 조선 측에서 중국어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고, 중국인들도 필담할만한 학식을 갖지 못했다. 손짓, 발짓, 몸짓, 표정, 그림으로만 소통하였다. 그들이 알세스트호에서 조대복 첨사에게 영어성경 한 권을 전해주었지만 전혀 알아볼 수 없었고, 선교의 목적으로 전해준 것도 아니어서 기독교 전도의 효과는 전무하였다.

 

그에 반해 귀출라프는 조선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에 대한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한문성경과 전도 책자 그리고 의약품을 가지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1832717일부터 817일까지 장산 녹도 고대도(원산도, 안면도, 창리, 간월도) 제주도를 순항하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실제로 기독 신앙을 전하였다. 그는 이미 중국어를 익혔고 한문으로 필담을 나눌 정도의 학식을 갖추기도 하였다. 또한 주기도문을 번역하고 유럽에 한글을 소개하였고, 감자를 전래하고 머루주 조제법을 전수하고 의약품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의 성품과 생활상 및 경제적 형편을 살피고, 하루빨리 쇄국정책 중단, 문호개방, 기독교 신앙 수용 필요를 역설하고 간구하였다. 그가 오기 전 그 누구도 조선을 직접 방문하여 이러한 선교활동과 조선의 기독교 신앙 전파를 위해 노력한 적은 없었다.

 

그가 조선을 방문한 후에 조선선교여행기(1884)를 남겼는데, 책의 서문에 조선에 대한 사전 정보를 자세히 기록하며 조선에 대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만개의 섬을 가진 해안국이면서 고약한 쇄국정책을 소중히 여기는 나라, 중국에 버금가는 역사로 단군신화가 있는 나라, 중국의 문자(漢字)를 사용하는 나라, 중국과 전쟁하여 승리 역사가 있는 나라, 독립 능력이 있으면서 조공을 바치고 중국 황제 승인으로 국왕이 즉위하는 나라, 일본과 전쟁하여 퇴치한 나라, 하멜이 도착한 나라, 대마도, 중국, 만주와는 비밀리에 무역을 하는 나라, 진보적인 개방으로 이웃 중국과 일본이 빠른 문화발전이 이루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나라, 천주교 신앙이 극심한 박해와 천주교인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귀출라프는 우선 고대도에 도착하자 <전도책자 배포와 문서선교>에 힘썼다. 725일 녹도에서 안전하고 고관을 만날 수 있는 고대도로 이동한 후, 26일부터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전도 책자를 전해주었다. 또 상륙하여 수시로 관리 및 주민들에게 책자를 나눠주었다. 87일에는 인근 창리와 간월도를 찾아 주민들에게 책자를 배포하였다. 810일에는 가장 큰 섬(원산도?)에서 노인에게 책을 전해주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다음은 <한문 성경 배포>하였다. 국왕 예물로 성경을 전하였는데, 그가 1823년 개역한 신천성경(神天聖經)일 것이다. 그는 이 고립된 나라의 통치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은총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죄 많은 인간을 위해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보다 국왕에게 더 귀한 예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국왕에게 그러한 구원의 교리를 전해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매우 기뻐했으며, 그는 한동안 행복에 잠겼고 그 행복이 영원하길 소망하였다.

 

그리고 <한글 주기도문 번역하고 유럽에 한글을 소개>하였다. 727일 양의(Yang-yih)로 하여금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오랜 설득 끝에 양의(Yang-yih)로 하여금 한글 자모 일체를 쓰도록 하였다. 귀출라프가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쓰자, 그가 한글로 토를 달고 그리고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러자 양의는 손으로 목 자르는 표시를 반복하면서, 만약에 고관들이 이 사실을 알면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그 종이를 없애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염려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 종이를 상자 속에 넣어 잠그고 누구도 볼 수 없도록 하겠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이날 귀출라프는 여러 한자에 해당하는 한글을 입수하기도 하였다.

 

귀출라프는 12개국어를 구사하고, 6개국어로 출간할 정도로 언어의 귀재였다. 고대도에서 돌아가자 183211월 한글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글의 닿소리와 홀소리가 결합하여 168개의 조합을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글자의 짜임새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착상이 교묘하고 매우 표현력이 풍부한 말과 글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한글 글자의 계통, 한글 자모에 대한 음성학적 분류, 한글의 로마자화, 한국말의 특징, 한국말의 문법, 한국말의 방언, 한국문화의 정도까지 소개하였다.

 

귀출라프는 <감자 전래와 농업 선교>에도 힘썼다. 감자 재배 방법을 자세히 적어왔다. 해안의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땅을 골라 1백 개 이상의 씨감자를 심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이 둘러서서 놀라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땅 주인에게 재배법 적은 종이를 주었는데, 그는 그것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한 선행에도 관리들이 처음부터 맹렬히 반대하는 것은 외국 작물을 들여오는 것은 국법 위반이기 때문이었다.

 

감자의 우리나라 전래에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순조 24~25(1824~25)에 관북에서 처음 들어와 헌종13(1847) 경기 충청 강원도 지방에 재배 보급되었다.”라는 것이다. 둘은 김창한의 원저보(圓藷譜)에는 남방으로부터 감자가 전래되었는데 순조 32(1832)이라 하여 귀출라프가 고대도에 감자를 심어준 시기와 일치한다. 그는 섬에서 야생 복숭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산포도(머루)를 발견하고는 머루주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귀출라프는 <조선인의 비참한 생활과 빈곤>을 지적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외국에 문호개방과 선진문물 수용이 답이라고 하였다. 주민들의 집은 보통 방 두 칸이고 부엌은 집과 연결되어 있었다. 난방을 위해 마루 밑에 큰 구멍을 만들고 적당한 양의 나무를 때고 있었다. 모든 집은 마른 나무로 울타리로 둘러쳐졌다. 집들은 네모났고 집들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몹시 불결하였고 빈곤 속에서 살았다. 그들의 피부는 때로 덮여 있었다. 수개월 씻지 않은 상태였다. 이가 온몸에 득실거렸고 아무데서나 이를 잡기도 하였다. 살림 도구도 형편없었다. 대부분 흙으로 빚은 조잡한 것이었다. 단 한 개의 동전을 보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고 불편하였다.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하였지만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근면하지 못했고, 근면할 필요도 없었으며 노력의 대가를 누리는 것이 허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또한 읽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하지만 고관들은 달랐다. 잘 차려입었으며 제한된 사회 속에서도 모든 편의를 다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관리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군졸들에게 함부로 매질을 하는 횡포에 격분하기도 하였다.

여자들은 눈에 띄면 도망을 갈 정도로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그녀들은 아기를 돌보거나 그치지 않는 가사 혹은 농사 노동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들의 부모나 남자들로부터 배려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남자들은 이곳저곳을 배회하거나 멍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여성들의 노동을 전혀 돕지 않았다.

 

섬은 비옥하였다. 곳곳에 자라는 자연 산물을 개발 이용하지 못하는 나태함이 안타까웠다. 언덕 꼭대기에는 석조 건물이 있었는데 당집이었다. 죽은 자의 말 없는 유택(幽宅)인 흙무덤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기리는 사당이 있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지만, 불교는 싫어하였고 도교는 잘 모르고 있었다. 영혼 불멸에 대한 신념을 공언하면서도 중요한 요점은 설명을 못 하였다. 그들은 비종교적인 사람들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위로를 제공하는 좋은 교리를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들의 고립은 외국문물 수용을 차단하였고 생활조건 개선을 막았다.

 

주민들은 건전한 상식과 대단한 자부심과 무감정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다수는 지나치게 주정(酒精)에 빠져 있어 엄청난 분량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범죄도 그들 사이에는 흔한 것 같다. 예의에 대한 관념은 독특하나 그들이 잘못하고 그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전적으로 무례한 것은 아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로 그들을 방문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소망하면서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통상 교섭은 결렬되었고 섬을 떠나라는 생명 위협의 압박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왕은 거절하였다고 하지만 성경을 받았을 것이다. 간경(Gan-keang, 고대도)의 모든 관리들과 주민들은 성경을 받았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비록 시작은 미약하나 축복해주신다.’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조선을 위하여 좋은 날들이 밝아 오기를 희망할 뿐이다. (다음 34, 35편에서는 조선 측의 대응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