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 개척의 역사 / 청라 재뜰 언덕에 물길 내어 옥토로 만든 황룡리 사람들
조선 후기 사람 살기 좋은 지역과 연유를 밝혀내어 쓴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우리 보령에 대한 언급이 있어 눈에 띈다. 특히 산수(山水) 편에는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 청소 성연리, 청라동, 화장골 등은 산수의 경치가 빼어나고 너른 바다와 깊은 산이 멀지 않아 물산이 풍족하고 물과 바람이 잘 통하여 사람 살기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곳에 사는 것을 ‘溪居’라 부르고 우리 지역 계거로 일찍부터 유명 성씨들이 대거 몰려 살아왔다고 한다. 靑蘿洞의 光山金氏, 獨亭과 松堂의 慶州李氏, 질굴(挃谷)의 綾城具氏, 石隅의 慶州金氏, 長峴의 安東金氏와 平山申氏, 牆內와 鳴垈의 韓山李氏, 黃谷의 原州元氏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계거에 세거해 오면서 학문과 인성을 닦으면서도 산기슭을 개간하고 물길을 내어 옥토로 만드는 등 억척스럽게 땅을 일궈내었으며 자신들의 철학과 이상에 맞도록 경관(景觀)을 가꾸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은 과거의 일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 지역민의 억척스런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오서산 아래 황룡리 돌머루 마을에서 청소 또는 광천으로 넘는 넙티 고개 바로 아래 석우천에는 조그만 보를 막아 돌머루 마을 안을 지나는 물길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저수지 축조 관련 공적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이 물길과 공적비가 바로 위 ‘계거’와 관련한 개척의 역사를 보여주는 실제이기에 소개해 본다.
오서산 아래에는 앞내인 황룡천을 앞에 두고 황룡리가 들어서 있다. 그 중에 서편으로 옥계리 서촌마을과 황룡리 용두마을 사이에는 주변 다른 지역보다 조금은 높은 곳에 널찍한 벌판이 펼쳐져 있다. 이름하여 재뜰(산기슭을 개간한 들녘/처음엔 재들이라고 불렀을텐데 지금은 재뜰이라고 통용되고 있다.)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재뜰은 솔밭이 우거진 산기슭이었는데, 황룡리 사람들이 나서서 조금씩 산을 개간하여 급기야 전부 논으로 만들었고 그러한 개간 작업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황룡리 제일 위 동네인 돌머루 앞 석우천 상류에 보를 막아 재뜰로 2km 이상의 긴 물길을 내었다.
언제부터 물길을 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처음 재뜰 개간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처럼 중장비가 있기 전의 시절인지라 마을 사람이 모두 나서서 삽과 곡괭이로만 몇 날이고 힘을 들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 당시 주민들의 개척정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물길은 돌머루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재뜰로 들어갔고, 물길 타고 흘러간 물은 거기 논과 밭을 촉촉이 적셔주기에 충분하였다. 이 물길이 없었다면 재들은 하늘만 바로보는 천수답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2009년 오서산 중턱에 황룡저수지를 축조되어 재뜰은 물론 인근 농경지까지 물 걱정 없이 농사짓게 되었다. 저수지가 축조될 때 그 공사를 진두지휘한 황룡리 출신 농정담당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원규 부이사관의 공적비가 석우천 바로 옆에 있기도 하다. 지역민의 염원이 해결되어 고마운 인사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