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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보령] 신재완의 문화산책 , 보령시 청라면 신산리 개척의 역사

 신재완 보령문화원 이사

 

 

신산리 내력

오서산 아래 보령시 청라면에서 청양군 화강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물편이 고개가 있다. ‘물의 흐름을 서로 가른다.’하여 고개 이름마저 물편이라고 칭한 것이다. 고개 남쪽으로는 보령시 청라면 신산리가 들어서 있어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여우내라는 시내를 이루다가 서편 대천천으로 흘러들고, 고개 북쪽으로는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가 들어서 있는데 내내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시내를 이루다가 백월산 아래 산정천과 모아져 북쪽 무한천으로 흐른다.

 

신산리라는 마을 이름은 신평(新坪)과 박산(朴山) 동네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붙여진 것이다. 신평은 새말이라는 동네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친 이름이고, 박산은 오서산 맞은 편 동쪽에 우뚝한 산 꼭대기가 사각진 밥상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새말은 신산리의 오래된 동네보다 늦게서 새로이 들어선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그 내력을 알 수 있는 빗돌이 있어 소개해 본다. 그 빗돌은 바로 담양전씨 효열비이다.

 

신산리 새말에 세워진 담양전씨 효열비(潭陽田氏 孝烈碑)

청라 신산리에서 화성 화강리로 넘는 물편이 고개 마루에는 새말이 보이는 도로가에 담양전씨 효열비가 있다. 앞면에는 담양전씨 효열비라고 적혀있고, 뒷면에는 담양전씨의 효행 및 수절의 아름다운 행실과 새말 개척의 굳센 이야기가 적혀있다.

 

비문에 의하면 담양전씨는 신산리에 들어오기 전 오서산 넘어 홍주 땅에서 스무살 나이에 영광김씨 28세손 김명원과 결혼하였는데, 결혼 직후 시부모와 남편이 연달아 병석에 눕게 되었고, 가산을 다 털어 병 구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끝내 시부모와 남편을 잃고 졸지에 어린 아들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녀는 1830년 전후에 새로운 활로를 찾아 오서산 넘어 여기 신산리 새말에 들어왔다고 한다.

 

젖먹이 아들 영광김씨 김시학을 이끌고 들어와, 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새롭게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영광김씨의 가문은 다시 반듯하게 일어나게 되었고, 곤궁한 살림을 벗었으며 대와 학문의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후손들은 빗돌을 세워 새말의 내력과 담양전씨 할머님의 은덕 감사 및 효열을 기리고 있다.

潭陽田氏 孝烈碑
田氏 1805年 乙丑生 本貫 潭陽 顯祖 號 松崖公 得雨之后 父長錫 出身地 忠南 洪州 夫金命元 本貫 靈光始祖平章事 文安公諱 審言二十八世孫 顯祖門下平章事諱永夫諡英簡公二十參世孫潭陽田氏幼時로부터 天性溫厚하시고 孝誠至極하여 十八歲時于歸于金門이라 家勢淸貧하여 生計困逼하나 父母養嗜養志之誠으로 섬기고 夫君恭敬하사 겨우 二十餘媤父母兩位分께서 病席에 누으시매 百藥無效及其兩位俱沒하야는 三喪로써 致祭후에 곧 이어 家君病席에 누며 百藥無效天崩之痛하고 나니 時年二十參歲貧困財産에 먼저 父母兩位喪致奠3년을 치르고 荐遇夫君臥病治療費 兼하여 喪事三年居喪을 치르고 나니 家産蕩盡이라農土草家一棟까지 債權者에게 내여주고 자근 媤叔님들께 稱廟先祖祭享所託하여 曰宗家長子婦로서 家廟를 모시지 못하고 離鄕함은 千萬不可함을 잘아나이곳에 오래 하면 守節을 못하고 毁孀不免일가 두려워하노라 하고 孑孑單身襁褓乳兒를 업고 定處없이 當到하신 곳이 卽 保寧郡 靑蘿面 新山里 新村部落에 이르러 山下荒廢地土堀一間하여 居室하며 힘써 微弱한 힘으로 山田開拓하여 生計圖謀하며 隣近虛言으로 云謂하되 我家長洪州에서 素居러니 家運顚倒됨에 따라 他人負債를 가다못하여 남의 집 雇傭사리로 負債償還決心하고 我獨乳兒負抱하고 定處없이 故鄕作別後此地에와 定着하였노라하며 往往洪州에 자근 媤叔宅卽兄弟四戶分居하니 長房夫君 命元이시고 次房命攢이요 三房命道四房命喆이시라 洪州九龍實先代墓下列居媤叔宅隨時訪問往來詐稱하니 維知寡婦維敢無視리오 歲月流邁하여 獨子이신 始學十八이라 子婦星州裵氏家門에서 맞어드려 數年以後에 첫孫兒誕生하니 卽 東顯이시고 次孫東寶이시니 自此以後一門和氣融融하고 人生三樂晝夜不絶이라 歲月無情하여 年過五十이요 白髮星星하사 隣居老婦人등으로 同膝對坐하여 하되 其間虛言으로 隣近詐妄한 것을 今日 謝罪하노라하시고 其間家長洪州潛在라함은 隱居之筙이였노라 我二十三靑春寡身으로 襁褓獨子를 키워 此家門骸骨을 묻어 上古聖賢의 가리치신 三從之道받고자 결심하였기 至今說明하노니 我子 靈光金氏 後孫이요 潭陽田氏 后라 하시와 老衰之時에야 自己신분과 子孫本貫을 발키사 一生로 마치셨기로 이곳을 靈光金氏世阡之地하여 漢基爲始하여 그곳에 列擧하다 忠義孝烈錄에 기록되어 있음
檀紀 四三一三年 庚申 三月 十六日 六代孫 漢基 選記